주자朱子 기념관 중국 강서성 무원(婺源우위안) 熹园(희원) 가는길

2021. 11. 14. 23:12여행/중국 중앙아시아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朱熹(주희, 1130∼1200)는 중국 南宋(남송) 때의 儒學者(유학자)로 시호는 文公(문공), 朱子(주자)로 尊稱(존칭)되었다.

 

性理學(성리학)의 집대성자이며, 1179년 백록동서원을 세워 서원교육의 바람을 일으켰고, 

경서의 문헌 비판이나 훈고명물(訓詁名物)의 고증, 자연 지식의 개척 등으로 淸朝(청조)의 고증학 선구자가 되었다.

 

熹園(희원) (朱熹, 주희)은  주희[朱熹, zhuxi]의 본관인 신안(新安)에 있는 朱子(주자) 기념관이다. 

중국 행정구역 개정으로 신안(新安)은 안휘성의 현급지역이었으나  강서성 무원(婺源 우위안)으로 바뀌었다

朱熹(주희, 1130∼1200)는 만년에 정적(政敵) 한탁주가 주희의 학설과 행실에 대해 중상모략을 하여

朱熹의 학문을 위학(僞學)이라 하여 저서의 간행과 유포가 금지하고, 정치활동을 비롯한 모든 공적인 활동이 금지시켰다.

송 황제는 한탁주가 죽고 난 후 朱熹 사후에 복권시키고 시호 文公(문공)를 내린다.

1241년에는 朱熹 위패가 공자사당에 모셔짐으로써 유교의 성인으로 인정하였다.

 

 

이후 주희熹가 세운 성리학은 오랫동안 중국과 동아시아 지식인 사회를 지배해왔다. 

주희熹의 사서에 대한 주석서는 중국에서 과거의 교재였기 때문에 과거에 합격하려는 사람들은 꼭 공부하는 교재가 되었다.

 

그의 사상은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예컨대 송시열은 말하였다.

세상의 모든 이치는 주자가 이미 완벽하게 밝혀 놓았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다만 그의 이치를 실천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주자의 말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주장을 하거나 주자와 다른 경전의 주석을 다는 자는 사문난적일 뿐이다.”

또 주희朱熹의 철학은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널리 받아들여져 공적인 인정을 받았다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주자朱子의 저서는 아래와 같다.

『논어요의(論語要義),『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곤학공문편(困學恐聞編), 『정씨유서(程氏遺書),『논맹정의(論孟精義),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

『서명해의(西銘解義),『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통서해(通書解),『정씨외서(程氏外書),『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고금가제례(古今家祭禮),『근사록(近思錄),『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注)

『주역본의(周易本義),『시집전(詩集傳),『초사집주(楚辭集注)』등

 그의 글은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으로 편집되었고

 제자들과 학문하면서 토론한 내용은 『주자어류(朱子語類)』로 편찬되었다.

 

 

주자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위치 

주희[朱熹, zhuxi]의 본관인 신안(新安)에 있음 (현재 지명 강서성 무원 婺源)

신안(新安)의 지명은 중국 행정구역 개정으로 안휘성에서 강서성 무원(婺源우위안)으로 바뀌었다.

 

熹園(희원) 가는길 

1. 인천에서 중국 상해로 항공으로 도착후, 푸동공항에서 홍차오역으로 이동 (약 1시간 소요) 

3. 홍차오역에서 강서성 무원(婺源우위안)까지는 고속기차로 3시간 거리

4. 고속기차역에서 熹園까지 택시로 이동 

5. 만약 택시가 없으면 시내버스(버스번호 2번 등)를 탑승한 후 "朱子步行街""에서 하차하여 10여분 걸으면 熹園(희원)에 도착한다.

6 熹園(희원) 내부의 호텔은 매우 인기가 있어서 미리 예약 필수

天佑假日酒店(婺源高鐵站店)(天佑假日酒店(婺源高铁站店))등 숙소와 식당/상가가 있으며 婺源熹园까지 910M

跡墨九間房(婺源朋來聚店)(迹墨九间房(婺源朋来聚店)) 婺源熹园까지 110M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熹園(희원) 안내센터 표지 안내센터에서 방문등록하고 熹園(희원)에서 제공하는 복장을 하고 안내를 받을 수 있음.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婺源熹園(무원희원) 안내센터 표지, 안내센터에서 방문등록하고, 熹園(희원)에서 제공하는 복장을 하고 안내를 받을 수 있음.

 

中文名称婺源熹园地理位置江西省婺源县紫阳镇汤村街18号占地面积17000平方米开放时间全天景点级别国家AAAA级景区门票价格55元著名景点尊经阁,朱家庄,紫阳书院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문공 朱文公 주자朱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가훈(朱子家訓) 죽간본.

 

學貴有疑,

小疑則小進, 大疑則大進,不疑則不進. (朱子家訓  주자가훈중에서)

 

배움에서 의심하는 것이 귀중하다.

작게 의심하면 작게 진보하고 

크게 의심하면 크게 진보하며 

의심하지 않으면 진보란 없다" 

 

주자가훈(朱子家訓)은 명(明)나라 때의 백려(柏廬) 주용순(朱用純1620-1690)이 주자의 거가격언(居家格言)을 가지고 만든 것이다. 

'주백려치가격언(朱柏廬治家格言)' 또는 '주자치가격언(朱子治家格言)'이라고도 한다

 

주자치가격언(朱子治家格言)

朱文公(주문공)이 曰(왈),

 

家若貧(가약빈)이라도 不可因貧而廢學(불가인빈이폐학)이요

家若富(가약부)라도 不可恃富而怠學(불가시부이태학)이라.
주문공이 말하기를,
집이 만약 가난해도 가난 때문에 배움을 그만두어서는 안 되며
집이 만약 부자라도 부(富)를 믿고 배움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貧若勤學(빈약근학)이면 可以立身(가이입신)이요
富若勤學(부약근학)이면 名乃光榮(명내광영)이라.
惟見學者顯達(유견학자현달)이요

不見學者無成(불견학자무성)이니라.
만약 가난한 사람이 열심히 배우면 출세할 것이며
부자가 열심히 배우면 곧 이름이 영광으로 빛날 것이다.
오직 배운 사람만이 훌륭하게 되는 것을 보았으며
배운 사람이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보지 못했다. 
 

學者(학자)는 乃身之寶(내신지보)요
學者(학자)는 乃世之珍(내세지진)이니라.
是故(시고)로 學則乃爲君子(학즉내위군자)요
不學則爲小人(불학즉위소인)이니
後之學者(후지학자)는 宜各勉之(의각면지)니라.

배운다는 것은 곧 몸의 보배요
배운 사람은 곧 세상의 보배이다.

고로 배우면 곧 군자가 되고 배우지 않으면 소인이 될 것이므로 
후에 배우는 사람들은 각각 의당히 힘을 써야 한다.


<명심보감- 勤學篇>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자 朱子 기념관 熹園(희원)







 

 

 

주희[, zhuxi] 생애 해설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주희[, zhuxi]의 자는 원회(元晦), 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산인(雲谷山人), 창주병수(滄洲病叟), 둔옹(遯翁) 등이 있다.

주희는 1130 9 15(음력), 일가가 전란을 피해 임시로 거처하던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에서 아버지 주송(朱松)과 어머니 축씨(祝氏)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관적(貫籍), 즉 본관은 신안(新安)인데 신안(新安)은 강서성 무원현 (우위안, )의 옛 지명이다.

강서성 무원현 (우위안, )에는 주희[, zhuxi] 10대조부터 살던 곳을 시위안(熹園)으로 단장하고 손님을 맞이 하고 있다.  

주희[, zhuxi ] 선조들이 무원현 (우위안, )에 살고 있었으나, 아버지 주송 주송(朱松)은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宰相) 진회(秦檜)와의 의견충돌로 퇴직하고 복건(福建) 우계(尤溪)에서 우거(寓居)한다. 1130 9 15(음력), 주희[, zhuxi] 태어났다. 주희는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부친의 유언에 따라 호적계(胡籍溪), 유백수(劉白水), 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한다.

주희  는 이 기간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었다. 그러나 24세 때 연평(延平) 이통(李侗)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한다. 1158년에 주희는 이통을 찾아갔고, 1160년에는 수개월 동안 그와 함께 지내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송대의 성리학자들 가운데 불교와 도교의 철학에 대항하여 새로운 철학 이론을 제창하면서 거의 1,000년 동안 사상의 주도적 위치를 상실하였던 유학의 학문적, 사상적인 위상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일었는데, 주희는 이통의 영향을 받은 이후 이 일에 전념할 결심을 한다.

주희 의 학문 토론 친구로는 장남헌(張南軒), 여동래(呂東萊)가 있고, 또 논적으로는 육상산(陸象山)이 있었는데, 이들과 상호 절차탁마(切磋琢磨)하면서 학문을 비약적으로 발전 심화 시켰다. 그는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고, 대부분의 시기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1179-1181년 사이 강서성(江西省) 남강(南康)의 관리로 근무할 때 주희는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재건했다.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9세기에 건립되어 10세기에 번성했다가 몰락하여 폐허가 되었다가, 주희가 재건한 이래 오랫동안 명성을 유지했다. 그런 서원들이 성리학이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된 제도적 기반이었다. 1188년 주희는 황제의 도덕수양이 국가 안녕의 기반이라는 주장을 담은 상소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주희는 철학 뿐 아니라,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이 무원칙하다고 여겨고 이를 재편집하여, 1172년에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완성한다. 이 책은 동아시아 전역에서 널리 읽혔고, 유럽에서 최초로 간행된 중국 역사서인 『중국통사』(1777~85)의 토대가 된다.

주희는 만년에 조정의 초청을 받아 고위직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으나, 직언을 하고, 늘 소신 있는 의견을 펼쳤으며, 부패와 사욕이 지배하는 정치판을 비타협적으로 공격하다가 파면되거나 외진 지방의 관직으로 쫓겨났다. 만년에 이르러서 정적(政敵)인 한탁주가 주희의 학설과 행실에 대해 중상모략을 하여 그의 학문을 위학(僞學)이라 하여, 저서의 간행과 유포가 금지되었고 정치활동을 비롯한 모든 공적인 활동이 금지되었다. 그가 죽을 때까지도 정치적인 명예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다가 그가 죽은 뒤에 곧 회복되었다. 1209년과 1230년에 그에게 시호가 내려졌고 1241년에는 그의 위패가 정식으로 공자사당에 모셔졌다.

주희의 성리학은 오랫동안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식인 사회를 지배해왔고, 사서에 대한 그의 주석서는 과거에 합격하려는 사람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책이 과거 교재였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은 특히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예컨대 송시열이라는 학자는 세상의 모든 이치는 주자가 이미 완벽하게 밝혀 놓았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다만 그의 이치를 실천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주자의 말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주장을 하거나 주자와 다른 경전의 주석을 다는 자는 사문난적일 뿐이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또 주희朱熹의 철학은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널리 받아들여져 공적인 인정을 받았다.

주희의 저서로는 『논어요의(論語要義),『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곤학공문편(困學恐聞編), 『정씨유서(程氏遺書),『논맹정의(論孟精義),『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서명해의(西銘解義),『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통서해(通書解),『정씨외서(程氏外書),『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고금가제례(古今家祭禮),『근사록(近思錄),『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注), 『주역본의(周易本義),『시집전(詩集傳),『초사집주(楚辭集注)』등이 있다. 나중에 그의 글은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으로 편집되었고, 제자들과 학문하면서 토론할 때 남긴 주희의 말은 『주자어류(朱子語類)』로 편찬되었다.

생애 연보

1130: 건염(建炎) 4, 9 15일 정오에 부친 주송(朱松, 1097~ 1143)과 모친 축 씨(祝氏) 사이에서 삼남(三男)으로 탄생. (두 형은 모두 어려서 사망함)

1137: 소흥(紹興) 7, 건주성남(建州城南)에 환계정사(環溪精舍)를 세워 일가가 이사함.

1143: 부친 사망. 부친의 유언에 따라 유병산, 유면지, 호적계를 사사함.

1144: 선승 도겸(道謙)을 찾아 배움.

1147(18): 가을에 건주에서 실시된 예비과거시험에 합격함.

1151(22): 이부(吏部) 임관 시험에 합격하여 동안 현 주부(主簿)가 됨.

1153(24): 동안현 부임길에 이통을 방문. 이후 10년 동안 세 차례 가르침을 받음. 7월에 장남이 출생.

1159(30): "상채어록"(上蔡語錄)을 교정. 장구성(張九成) 사망.

1162(33): 효종이 즉위한 후 '임오응조봉사'(壬午應詔封事)를 올림.

1163: "논어요의"(論語要義) "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 완성.

1164: "연평답문"(延平答問) 저술 착수.

1166: '잡학변'(雜學辨) 완성.

1168(39): "정씨유서"(程氏遺書) 편집을 완료함.

1169: '태극도설'(太極圖說) '통서'(通書)를 교정함.

1170: '서명해'(西銘解) '지언의의'(知言疑義) 완성.

1172(43): "팔조명신언행록", "맹자요의"(孟子要義) 완성.

1173: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정씨외서"(程氏外書) 완성.

1174: "대학장구" "중용장구" 초고 완성. "대학혹문" "중용혹문" 완성.

1175: 여동래와 "근사록"을 편찬함. 육구연 형제와 아호지회 논쟁을 벌임. 운곡암을 지어 초당의 이름을 회암(晦菴)이라 함.

1177(48): "논어집주", "맹자집주", "논어혹문", "맹자혹문" 완성함.

1184(55):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완성함.

1186(57): "역학계몽" 완성.

1187: "시집전"(詩集傳)을 개정하여 완성함.

1189(60): '대학장구 서()', '중용장구 서()'를 지음.

1190: "주역본의"(周易本義) 완성.

1192: 건양 고정(考亭)에 집을 지음. 12월에 육구연 사망.

1194: 장사에 부임하여 악록서원(岳麓書院)을 복구함.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준공하고,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편찬에 착수함.

1195: 조봉대부(朝奉大夫)(6)로 승진했으나 이 해 말부터 위학(僞學)으로 박해받기 시작하여 다음해 탄핵당하고 사록관에서 파면.

1197(68): "한문고이"(韓文考異) "주역참동계고이" (周易 參同契考異)를 완성.

1198(69): 여조검과 채계통이 유배지에서 사망.

1199(70): "초사집주"(楚辭集註) '후어'(後語) '변증'(辨證) 완성.

1200(71): 건양 고정에서 병사함.(이강대, "주자학의 인간학적 이해" 부록 참조)

[네이버 지식백과] 주희 [朱熹, zhuxi]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