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道 가사문학길 - 소쇄원(瀟灑園) 적벽 환벽당(環碧堂) 명옥헌 원림 몰염정

2022. 6. 30. 12:52여행/국내여행

 

 

 

南道 가사문학길 - 소쇄원(瀟灑園) 한국가사문학관 적벽 환벽당(環碧堂) 명옥헌 원림 몰염정

 

소쇄원(瀟灑園)

 

소쇄원(瀟灑園) 빗소리 소(瀟), 혹은 물 맑고 깊을 소(瀟)이고 灑는  물 뿌릴 쇄(灑)나 깨끗할 쇄(灑)라는 뜻과 음을 갖는다. 

소쇄원(瀟灑園)은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간 원림이다. 

한국 민간 원림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 명승 40호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경외와 순응, 도가적 삶을 산 조선시대 선비들의 만남과 교류의 장 

경관의 아름다움이 가장 탁월하게 드러난 문화유산.

 

소쇄란 孔德璋의 <北山移文>에 나오는 말로 “깨끗하고 시원하다"라는 말이다. 

 “물 맑고, 시원하며 깨끗한 원림”이라 하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며,  ‘속세를 떠난 느낌이 있다’는 뜻으로도 말할 수 있겠다.

 

내원內園의 면적은 1400여 평의 공간에 불과하지만  외원外園까지 포함하면 수 만평에 이른다.

조성된 건축, 조경물은 상징적 체계에서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절묘하게 이뤄내고 있ㄷ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봉대와 광풍각 그리고 제월당이 있으며, 

긴 담장이 동쪽에 걸쳐 있고, 북쪽의 산 사면에서 흘러내린 물이 계곡을 이루고 흘러내려와 담장 밑을 통과하여 소쇄원의 중심을 관통한다.

 

조경 수목은 대나무와 매화, 소나무, 난, 동백, 오동, 배롱, 산사나무, 측백, 치자, 살구, 산수유, 황매화 등이 있으며, 초본류는 석창포와 창포, 맥문동, 꽃무릇, 국화 등이 있다. 

조경물로는 너럭바위, 흘러내리는 폭포, 걸상 모양의 탑아 榻岩과 책상 바위 상암床岩, 홈을 판 고목刳木으로 물을 이어가는 두 개의 연못, 上下池가 있다. 뿐만 아니라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는 애양단愛陽壇, 계곡을 건너지르는 외나무다리 약작略彴, 경사지에 적절히 단을 쌓아 꽃과 나무를 심고 담장으로 내부 공간을 아우르고 감싸는 조화로운 곳이다.

 

이러한 공간의 조성은 조선 중종 때의 선비로서 조광조의 제자인 소쇄공 양산보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정확한 조영 시기는 1530년대에 시작하여 그의 자식과 손자 대에 이르러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스승이 기묘사화(1519년)로 사사賜死되자 현세적인 꿈을 접고 은둔하여 처사處士로서의 삶을 산 것이다.

이후 정유재란으로 건물이 불에 타기도 했지만 

후손들에 의하여 다시 복원, 중수되어 현재까지 15대에 걸쳐 후손들이 잘 가꾸어 나가고 있는 조선 최고의 민간 정원이다.

 





 

 

 

 

제월당(霽月堂), 

 

갠 날의 달과 맑은 바람이라는 뜻이다. 

도량(度量)이 넓고 시원시원함을 이르는 의미로 제월광풍(霽月光風)의 준말이다.

 

제월당(霽月堂)는 소쇄원 정자군 전체 구성의 안채에 해당하며 방과 대청으로 구성된 가옥이다. 

그러나 주인이 기거하며 소쇄원을 경영하였을 주 공간이었으며 

정자라기보다는 정사(精舍)의 성격을 띠는 건물로  조용히 독서하는 곳이었다..

 

제1영 小亭憑欄

작은 정자의 난간에 의지해-김인후

 

소쇄원의 빼어난 경치 

한데 어울려 소쇄정 이루었네.

눈을 쳐들면 시원한 바람 불어오고

귀 기울이면 구슬 굴리는 물소리 들려라.

 

瀟灑園中景 渾成瀟灑亭 

擡眸輪颯爽 側耳廳瓏玲/

 

 

하서 김인후는 호남에서 조선시대 18 현 중 한 명이다.

그는 정자 주인 양산보와 사돈지간이다. 양산보의 차남 양자징은 김인후의 제자가 되었고, 이황의 문하에서도 공부했다. 

김인후는 수제자 양자징에게 벼루를 선물로 주었는데, 양자징은 그 벼루를 가보로 소장했다. 

양자징은 후에 김인후의 둘째 딸을 아내로 맞았다.

 

제월당의 이름은 주무숙(周茂叔) 주돈(周燉1017~1073)를 가리킨다.

중국 북송의 유학자로 송학의 개조로 숭앙되며, 통서, 애련설, 태극도설 등을 저술한 바 있다.

정암 조광조는 주돈(周燉)을 흠모하였는데 스승의 영향을 받은 양산보 또한 주돈(周燉) 흠모하여 집 이름 또한 이렇게 차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소쇄원 48영 시에서는 제월당을 구곡이나 원림에서 펼쳐지는 광경이 집적 보이지 않기 때문에 소리에 대한 표현으로 멋을 냈다. 

당호인 제월(霽月)은 ‘비 갠 뒤 하늘의 상쾌한 달’을 의미를 담고 있다.

 

18영에서는 제월당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지척이라 물소리 들리는 곳

대숲에 부는 바람소리가 들리는 곳 

咫尺潺湲池 千竿風響  "

 

계곡물이 직접 보이지 않는 거처로 소리의 공간이다. 

 

 

양경지도 그것을 거들며 이렇게 이른다.

 

텅 비고 하얀 세계를 보려면

시냇가에 앉아야만 하네

통통 푸른 하늘에 걸린 저 달도

바 갠 뒤의 빛이 더욱 어여쁘지

 

제월당의 의미는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가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 같고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

(胸懷灑落 如 光風霽月)

 

 

소쇄원 10경 

하늘 가 저 멀리 이미 사라졌다가 / 

다시 고요한 곳으로 불어오는 바람

바람과 대 본래 정이 없다지만 / 

밤낮으로 울려 대는 대피리 소리

還從靜處呼   無情風與竹 日夕奏笙篁

 

즉 자연의 음악이 울리는 신선과 통하는 소리, 선경(仙涇)  즉 대나무가 높이 자라서 대나무 윗부분은 바람에 흔들려 소리가 난다. 

이 소리를 선계(仙界)의 음악이라고 표현했다.

 

 

 















 

 

 

 

南道 정자기행 

푸르름을 사방에 둘렀다는 "환벽당(環碧堂) 

 

환벽당(環碧堂)은 조선 명종 때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1501~1572)가 세운 정자이다.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과 교유하였으며,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 등을 낸 김후(金珝)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한 후  62세 때 담양 부사로 있다가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산수 간 유유자적하는 여생을 보내려 충효리로 돌아왔다.

 

환벽당은 그가 집 뒤에 지은 별당으로, 

그는 이곳에서 자연을 벗 삼아 한가로이 사색하며  후진을 키우며 지역 향리 양반으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한때는 ‘벽간당’이라고도 불렀다 전한다. 

 

또 이곳은 송강 정철이 27세로 과거에 급제하기까지 10여 년 머물면서 공부했던 곳으로 더 유명해서 

송강정 식영정과 함께 정송강 유적의 한 곳으로 불린다.

정철은 이곳에 머물며 기대승, 김인후 등  고명한 학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임억령에게서 시를 배우며 여러 사람을 사귀었다.

 

푸르름을 사방에 둘렀다는 "환벽당"이라는 당호(堂號)는 신숙주의 증손자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이 지었다.

지형이 산과 녹수로 둘려있고, 또  집 주변으로   소나무와 숲, 창송(蒼松)  청림(靑林)이 가득하다 하여 지었다고 전한다.

 

광주호의 상류 창계천가의 식영정 등과 더불어 호남의 정자 문화권에 속하는 정자로 창계천을 사이에 두고 

식영정, 환벽당 그리고 소쇄원을 두고 "일동삼물(一洞三物), 일동삼승(一洞三勝)"이라고 부른다.

 

 

진정한 미인은 언제 어느 때 만나도 그 아름다운 자태여야 한다.

명품 정자 또한 그러해야 한다. 

문장에 뛰어나 이이, 송익필, 이달  등과 함께 파문 장계로 불렸던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1537~1582)이 

450여 년 전에 들렸던 모습과 변함없는 환벽정으로 시간여행을 안내받는다.

 

 

數曲煙溪淸若空  小堂閑夢蒲襟風 

覺來開戶無人見 斜日離離暎水中 

/玉峯集 上

 

두어 굽이 흐른 시내 허공(虛空)처럼 청명하니/

꿈을 꾸는 소당(小堂) 위에 맑은 바람 가득하네

잠을 깨어 바라보니 사람 인적 볼 수 없고/

흩어있는 저녁노을 물 가운데 가득하네.

 

담양의 누정문화는 사림파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른바 ‘귀거래(歸去來)’의 강호 생활을 청풍 고취(淸風高趣)로서 높이 평가하는 관념적 풍조

 '푸른 대숲이 주위를 둘러싼 집', 흐르는 물을 뒤로한 정자.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보면 주변에는 맥문동이 푸르게 둘러싸여 있고, 

정자 주위로 배롱나무와 왕벚나무, 느티나무 등이 정자의 앞뒤에 갖가지 화초들이  에워싸여 고고한 자태로 4월의 정취를 피워내고 있었다. 정자 앞 입구에는 양반들의 각진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의미의 사각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은  41세 되던 해인 1574년 당시 74세의 광주목사 임훈(林薰) 일행과 함께 무등산에 오른다.

유람한 감회를 적은 무등산 기행기인 유서석록(遊瑞石錄)에서 마지막 날 환벽당에 들려 이렇게 전하고 하고 있다.

 

....식영정에서 남쪽을 바라보니 정자 하나가 날듯이 서 있으며 

그 앞에는 반석(盤 )이 깔려 있고 

그 아래 맑은 물이 고인 웅덩이가 있다. 

이 정자는 학자 김윤제(金允悌)가 살던 곳으로 

영천(靈川) 신잠(申潛)이 환벽당이라 이름 지었다는 것이다. 

또 환벽당에 걸린 편액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이곳을 방문해 쓴 것이라고 한다.

 

정자 아래에는 전설이 서린 조대(釣臺)와 용소(龍沼)가 있다.

송천 양응정(松川 梁應鼎 1519 중종 14 ~ 1581 선조 14)은 여기에 오르고 환벽당 앞에서 배를 띄웠다고 이르며 이렇게 감흥을 이어간다.

 

환벽당 앞에다가 작은 배를 띄웠는데/ 

사군의 마음 역시 맑은 물과 같다네. 

오늘 아침 산옹과 약속 있어 달려오니/ 

바위 아래 창포에서 옥류가 뿜어 나오네

 

環碧堂前泛小舟 使君心跡共淸悠 

今朝又赴山翁約 石下曹蒲灑玉流" 

 

 

비가 내리니 시내는 물이 불어 돌 모서리를 파묻고/

물결을 구경하느라 하루 종일 작은 창에 기대었네.

처마 앞의 과일은 익어서 때로 머리에 부딪치고/

섬돌 앞에 숨은 고기는 손으로도 잡겠네.

雨後溪肥沒石稜 觀瀾盡日小窓憑 簷前果熱頭時佛 階前魚潛手可罾

 

 

산택에 사는 파리한 신선은 얼굴이 튀어나왔고/

소나무 사이에 집을 지으니 하늘을 기댔네.

이로 좇아 임학에다 비늘과 껍데기를 감추리/

인간 세상 어부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으려네.

山澤臞仙面有稜 松間架屋太虛憑 從今林壑藏鱗甲 不受人間漁父罾

 

그의 제자요 삼당시인의 한사람 최경창(崔慶昌 , 1539 ~ 1583)도 이곳에서 시를 남긴다. 

정자 주인 김윤제에게 형이라고 부른다. 배꽃이 피었다고 이르고 있어 봄날에 노래한 것이다.

 

높고 높은 정자가 있는 시내의 남쪽에/푸른 비단 빛 굽이굽이 돌고 맑은 하늘빛 담겨있네.

난간 밖 배꽃은 봄이 저물어 가니/뜰 가득한 향기로운 눈이 하늘하늘 떨어지네

 

 

정내 임억령의 시를 1950년 후손 김태병(金泰炳)이 판각하여 만든 현판이 걸려져 있다.

 

연기는 구름 기운과 섞어지고/

거문고 소리는 물소리와 섞이네.

석양에 술 취하여 돌아오니/

모랫길에 대가마가 삐걱 소리를 내네.

烟氣兼雲氣 琴聲雜水聲 夕陽秉醉返 沙路竹輿鳴

 

 

가랑비가 씻고 지난 숲 골짜기/

가마 타고 그냥 놀러 나갔는데

하늘 열리 듯 구름은 흩어지고/

넓은 골에 물은 비껴 흐르구나

微雨洗林壑 竹輿聊出遊 天開雲去盡 峽坼水橫流

 

백발은 천 가닥 눈발과 같은데/

저 푸른 솔 오월에도 선선하니

개미굴 같은 이곳 훌쩍 벗어나/

신선 학 타고 영주에 노니리라

白髮千莖雪 蒼松五月秋 飄然蛻蟻穴 笙鶴戲瀛洲

 

 

분수에 만족하는 즐거움 얻으니 /

관직에 관한 마음도 없어지는데

소나무에 달 떠 잠도 설친 터에/

물과 구름 흐른 데라 창도 젖어

自得顏瓢樂 無心羿彀遊  夢涼松月上 窓濕水雲流

 

시골 술맛 없다 어이 꺼릴 거며/

산밭에서 감히 풍년까지 바라리

저 가랑비 속에 소 타고 다니며/

나의 풍류를 창주에 부쳐보리라

村酒寧嫌薄 山田敢望秋  騎牛細雨裏 吾道付滄洲

석천집(石川集)3권 石川 林億齡 檀紀四千二百八十三年庚寅暮春 不肖後孫 泰炳謹稿

 

 

 

환벽당은 사촌이 소년 정 철을 만나 공부를 가르친 곳으로도 너무나 유명한 곳이기에 오늘에 이르러서도 그의 흔적을 좇는 이들이 많다. 

소나무들이 참으로 의젓하고 한껏 멋스러움을 자태로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시비(詩碑)는 그 풍채를 거대한 공룡처럼 우람하게 버티고 있다. 

당대의 송순도 이런 분위기를 그대 두지 않고 읊었다.

 

소나무 아래는 맑은 못, 바위 위에는 정자

정말 맑은 정경이 펼쳐지는 곳/

여기가 바로 신선이 사는 곳이네

날 보고 온 원숭이와 학들이 나를 놀리고 있네. /

어찌 속된 꿈을 아직 깨지 못하는냐고...

 

짝 맞는 늙은 솔란 조대(釣臺)에 세워두고

 

짝 맞는 늙은 솔은 조대에 세워두고 /

그 아래 배를 띄워 갈대로 던져두니

홍료화 백빈주 어느 사이 지나 /

관대 환벽당 용의 소에 뱃머리에 닿았어라

 

송강 정 철의 성산별곡의 한 대목이 어울리는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조대(釣臺) 그 시비 아래로 내려가 보면 바위가 듬직하게 둘러져 있다. 

앉아서 낚시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을 자아내고 있다.

그 바위의 전면에는 ‘조대’란 글이 새겨져 있으며, 

그 옆에는 지수석(止水石)이란 글이 새겨 그곳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정철과 인연이 많았던 곳이기에 그의 흔적이 많이 남겨 있다. 

조대의 두 그루 소나무(釣臺雙松)라는 제목의 시도 그러하다.

 

낮엔 두 소나무 아래서 시 읊으며/

못 밑에 노니는 고기를 보았네.

종일토록 고기는 아니 낚이는데/

유독 주인은 세상사를 잊었구나.

 

그 바로 아래 지척에 꽤 깊게 느끼게 하는 움푹 파인 곳이 보인다. 

이곳이 용소(龍沼)라고 불리는 곳이다.

듣기만 하여도 무언가 전설이 나올법한 이름이다. 

여기에서도 아주 상서로운 전설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 전설을 더듬어 보자.

 

 

어느 무더운 여름날 환벽당의 주인인 사촌 김윤제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자신의 집 바로 아래 냇가에서 한 마리의 용(龍)이 승천하는 꿈을 꾸게 됐다. 

기이하게 여긴 사촌은 하인에게 냇가에 가보라고 일렀다. 

하인이 하는 말이 웬 청년이 목욕을 하고 있음을 알리자, 

사촌은 즉시 그 청년을 데려오도록 하였다. 그 청년이 송강 정 철이다.

 

그 소년은 할아버지 고향에 가사의 환란을 피해 이곳에 내려온  정철이었다. 

이에 김윤제와의 인연으로 만난 정철을 환벽당에서 지내게 하면서 공부를 시키고 

17세 때 외손녀 류강항의 딸과 결혼시키고 외손녀 사위로 삼았으며, 

10년 뒤 정철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로 나아갈 때까지 학문적 정신적 절대적 도움을 준다. 

그래서 환벽당에 자주 들려 시를 남겼다.

 

한 줄기 샘물이 양 언덕 사이에 날리우고/

여뀌 꽃 물굽이에 마름 캐는 노래가 이네.

산 늙은이 시냇가 돌에 취해 누우니

아무려나 모랫가 갈매기는 왔다 갔다 하는고나

 

一道飛泉兩岸間 採菱歌起蓼花灣 山翁醉倒溪邊石 不管沙鷗自往還

 

그 옛날의 푸르름이야 이제는 찾아보기가 어렵지만, 

흐르는 물을 보고 있노라면 뜰망질을 하던 청년 한 명이 금방이라도 물에서 얼굴을 씻고 올라올 것 같은 상상이 든다. 

 

더불어 사촌의 제자로는 이런 송강 말고도 광주의 의병장 김덕령이 또한 있으니, 

과연 명소 중의 명소이며 사촌의 인품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정자 안에는 송시열이 쓴 "환벽당(環碧堂)"의 글씨와 더불어 임억령(林億齡), 조자이(趙子以)의 시가 걸려 있다. 

이 좋은 곳에 시조 한 수 없으면 서운한 것...

 

環碧堂(환벽당)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은 이런 노래를 남겼다.

 

만산이 두른  곳에 시내 한줄기  흐르는데/

취하여 난간에 기대니 학의 등이 하얗네

벼슬아치와  산림거사는  원래 분수  있나니/

눈앞의 술잔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

萬山圍處一川橫 醉後憑軒鶴背明 鍾鼎山林元有分 眠前撙酒未宜輕

 

해질녘 모래가에  작은 배가  비꼈는데/

포산은 연과  같아서  물속까지  비춰주네

노쇠한 늙은이 몸  세상 구할  힘  없지지만/

비낀 바람과 가는  빗속에서 편히 지낸다네

夕陽沙際小船橫 布傘如蓮水底明 衰老縱無兼濟力 斜風細雨往來輕 (석천집(石川集集) 권5

 

 

 

 

고봉 기대승은 환벽당의 송 판부 송순(宋純)의 시에 차운했다.(次環碧堂宋判府韻) 

여기서 차운은 그들의 정을 잇고자 하는 최소한의 행위였다.

 

만고의 구지 작은 하늘 간직하니 / 

흰 구름의 한가로운 그림자 해마다 같도다

돌 위의 높은 정자 아래엔 물이 흐르고 / 

숲속의 좋은 집 뒤에는 산도 있구나

 

萬古仇池藏小天 白雲閑影自年年 危亭據石非無水 華屋依林更有山

 

오두 되어 쓸쓸함을 달게 여긴 게 아니라 / 

응당 곡구와 함께 인연을 버린 거로세

인생의 곱고 추함 그대는 말하지 마소 / 

우선 깊은 술잔 잡고 호연지기 발하노라

 

不是遨頭甘落拓 應同谷口去夤緣 人生好醜君休說 且把深盃發浩然

 

 

 

가랑비가 수풀 골짜기를 씻고 난 뒤 

대가마 타고 잠깐 밖으로 나가보네. 

구름이 흩어지니 하늘이 열리고 /

골짜기 벌어지니 물이 비껴 흐른다.

 

흰머리는 천 줄기의 겨울날 눈발 같고 /

푸른 솔밭은 오월에도 가을 느낌이다.

표연한 기분은 개미구멍에서 나와서 / 

피리 불고 학타면서 영주에서 놀아보고 싶네.

 

조자이(趙子以, ?~?) 過松江先生舊居有感志懷仍贈鄭達夫

 

 

丞相故墟何處尋승상(丞相)께서 사신 옛터 어느 곳에 찾을 손가

鳴陽縣郭瑞湖潯명양(鳴陽) 고을 서호(瑞湖) 위에 그의 유적 남았도다.

淸名直節賢孫繼맑은 이름 곧은 절개 어진 자손 이어가고

餘韻遺風過客飲남긴 여운 맑은 유풍 지난 손이 흠모하네.

環碧亭空新易主비어있는 환벽정자 새 주인이 바뀌었고

棲霞堂在古猶今그 옛날의 서하당(棲霞堂)이 아직까지 건재하네.

通家小子悲吟地통가(通家)하는 이 소자(小子)가 찾아와서 읊조리니

老木寒波無限心늙은 나무 찬 물결에 이 마음이 설레이네.

 

 

환벽당에도 관련된 한문시는 무수히 많다.

송순, 임억령, 고경병, 김인후, 기대승, 정철, 

백광훈, 이은상, 김상흡, 이정구, 이하곤, 정홍명 등 

시인의 고향이요 시심의 시운지로서 오랜 세월 도시민들의 아늑한 휴식처로 자리하고 오늘도 성숙한 분위기로 아늑해지고 있다.

 

고경명이 김언욱ㆍ채광문ㆍ양천심ㆍ양득우ㆍ김백일ㆍ김려 등 제군이 

환벽당에서 깃들다가 돌아가려 하자 이렇게 서운한 마음을 흘린다.

 

梁得遇金百鎰金礪諸君來栖環碧堂其還 以短律一篇寫懷

 

我是逃空者 남모르게 숨어 살려고 하는데

君爲悅臭人 자네들은 왜 나를 찾아왔는지

半生攻篆刻 나이는 벌써 반평생이 지났어도

於道蔑涓塵 아무 쓸모없는 헛이름뿐이거늘

旋見垂歸槖 갑자기 모두가 흩어져 가니

無端濕別巾 하염없는 눈물이 수건을 적시네

荒詞出肝肺 짤막한 이 시 보잘 것 없지만

應記老夫眞 늙은 나의 심정 짐작하리라

 

환벽당은 역시 여름에 더 정자의 맛을 더한다. 

식영정 주인 임억령도 그랬다.

 

次環碧堂韻庚申夏

 

微雨洗林壑 가랑비 수풀 골짜기 씻어줌에

竹輿聊出遊 대가 마 타고 잠시 밖으로 나가네

天開雲去盡 구름이 흩어짐에 하늘이 열리고

峽坼水橫流 골짜기 벌어짐에 물이 비껴 흐르네

白髮千莖雪 흰머리는 천 줄기의 눈 발 같고

蒼松五月秋 푸른 솔은 오월에도 가을 느낌이네

飄然蛻螘穴 표연한 기분은 개미구멍에서 나와서

笙鶴戱瀛洲 피리 불고 학 타며 영주에서 놀아보려네

석천집(石川集)권3

 

환벽당에서[環碧堂]

雨後溪肥沒石稜 비 내리니 시냇물 불어 돌 모서리를 파묻고

觀瀾盡日小窓憑 물결 구경하느라 온종일 작은 창에 기대었네

簷前果熟頭時佛 처마 앞의 과일 익어 때로 머리 부딪치고

階前魚潛手可罾 섬돌 앞 숨은 고기는 손으로도 잡겠네

山澤臞仙面有稜 산택에 사는 파리한 신선 얼굴 튀어 나왔고

松間架屋太虛憑 소나무 사이에 집 지으니 하늘을 기댔도다

從今林壑藏鱗甲 지금부터 숲속에다 비늘과 껍데기 감추리니

不受人間漁父罾 인간 세상 어부 그물에 걸려들지 않으려네

烟氣兼雲氣 연기는 구름 기운과 섞어지고

琴聲雜水聲 거문고 소리 물소리와 섞였네

夕陽乘醉返 석양녘에 술 취하여 돌아오니

沙路竹輿鳴 모랫길 대 가마 삐거덕 삐거덕

 

환벽당 아래에서 배를 띄우며[環碧泛舟]

野艇載古月들 배에 옛 달빛 싣고서

沿洄楊柳間 버드나무 사이를 거슬러 오르네

鳴榔誤觸石 빈랑나무 울리다 잘못 돌에 부딪치니

宿鷺起沙灘 사탄에 잠자던 해오라기 놀라 날으네

 

 

기대승은 정자에서 자신을 빗대어 익살스러운 표현으로 시를 읊었다.

 

맑은 밤 창문 밖에 섰다가, 달을 맞아 발 걷어 올리네

둥근 그림자 푸른 하늘에 솟고, 밝은 빛은 낮은 처마에 퍼지네

 

곱고 고와 삼경에 가득하고, 희고 깨끗하여 마루에 들어 환하네

산골에 버려진 풍류 늙은이여, 글 읽는 소리 참으로 거치네

 

저기 가는 예닐곱 노래꾼들 성산별곡(星山別曲) 부르면서

식영정(息影亭)을 오르고서 소쇄원(蕭灑園)에 잠깐 취하고

 

환벽당(還碧堂) 죽림밖에 조대(釣臺)에 올라섰으니

노자암(鸕鶿巖) 자미탄(紫薇灘)을 뜻깊데 구경했는가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가 동복 현감으로 재직 중에 이곳에 들려 읊은 시를 소개 안 하면 서운할 것 같다.

 

봉래의 섬은 은은하게 보이고 / 

수백의 궁전은 맑은 모습이어라

못이 차워라 봄눈 아직 남았고 / 

처마 트인 곳 고요한데 외려 바람

隱隱蓬萊島  泠泠水伯宮 池寒春尙雪 簷豁靜還風

 

저물녘 자리에는 악기 우는소리 / 

타향에서 좋은 벗들과 모였어라

귀로에는 연꽃이 한창 피었으리니 / 

굽은 난간 동쪽에 머물러 흥을 즐기리

晩席繁絃咽 他鄕勝友同  歸途荷正發 留興曲欄東

 

養久往巡江邊與府尹別於環碧堂

먼 외지에서 다시 서로 만나/ 

술동이 앞에 놓고 마음 기울이노니

이정에 모인 우리는 나그네 길/

나랏일로 함께 바쁜 일정에 쫓긴다

絶域重相見 樽前意更傾 離亭是客路 王事共嚴程

 

흰 성가퀴라 산의 누각은 아득하고/

봄 못이라 물가의 난간은 맑구나

남아란 모름지기 사업을 이뤄야지/

이별 앞에서 마음 아파하지 말자

粉堞山樓逈  春塘水檻淸 男兒要事業 臨別莫傷情

 

 

마음 따뜻했던 이들도 회자정리는 피할 수 없는 섭리다. 

이제는 백골도 남아 있지 않았겠지만 그들이 부러운 것은 순리적 삶에서 우러나는 인간애였다.

 

먼 외지에서 다시 서로 만나 

술동이 앞에 놓고 마음 기울이노니

이정에 모인 우리는 나그네 길 / 

나랏일로 함께 바쁜 일정에 쫓긴다

絶域重相見 樽前意更傾 離亭是客路 王事共嚴程

 

흰 성가퀴라 산의 누각은 아득하고 / 

봄 못이라 물가의 난간은 맑구나

남아란 모름지기 사업을 이뤄야지 / 

이별 앞에서 마음 아파하지 말자

粉堞山樓逈 春塘水檻淸 男兒要事業  臨別莫傷情

 

 

 명나라 대문장가 고천준을 맞는 문사의 엄선에서 뽑혀 문명을 떨쳤으나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던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 선조 2∼1612 광해군 4)은 그들을 찾고 있었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술을 마시며 주필(走筆)로 긴 시를 남긴다.

 

君不見思庵朴政丞 家居冷落如山僧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사암 박 정승(박순)은 / 

집안 생활이 영락하여 산승과도 같아라

君不見松江鄭相國 百年行己能淸直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송강 정 상국(정철)은 / 

평생의 자기 처신이 참으로 청직하여라

 

 

豈但寒餓困一生 復令子孫無地耕 

자신만 빈한하여 일생을 고생할 뿐이랴 / 

자손들 농사지을 땅조차 없게 했도다

豈但寒餓困一生 復令子孫無地耕 

환벽당은 텅 비어 잡초만 무성하고 / 

배견와는 무너져 푸른 이끼만 남았네

 

 

生者飄零趨路傍 死者埋沒隨埃塵 

산 사람은 영락하여 길가에 다니고 / 

죽은 사람은 묻혀 먼지 따라 사라졌네

男兒行世別有路 莫把陳編徒自苦

남아의 세상살이에는 따로 길이 있으니 / 

해묵은 서책 가지고 사서 고생하지 말라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도 

아버지 김수항이 강진 진도에 유배 오면서 문안차 들리며  

당시 능주 목사였던 조정이(趙定而)와 함께 환벽당(環碧堂) 소쇄원(瀟灑園)도 을렸다. 

그가 쓴 남유일기( 南遊日記)에 남아 있다.

 

二十日晴 士友梁敬之采之及擇之兩子及李 缺 鄭浩然來集叙欵 同至環碧堂 鉅竹萬竿 檀欒映蔚影于百頃大陂上 築石爲釣磯可數百間 致可樂也 堂宇明敞 允愜棲息 堂西層堦 列植梅栢 中闢小塘種蓮 曲曲有妙致 坐堂上見陂水 閃閃綠動竹間 白雨驟至 颼瑟助興 吟留一律而歸

 

그는 환벽당내 건물이 수백 칸이라고이라고 적고 있어 눈길을 끈다.

"築石爲釣磯可數百間"

 

정자는 우리네 선비들의  유정천리를 잇는 까페였다.  

우리는 여기서 처사들이라는 그들은 왜 은거를 택했을까?  

 

장자(莊子) 외편(外編) 각의편(刻意篇)에서 찾을 수 있다.

무릇 염담, 적막하고 허무, 무위한 것은, 곧 천지자연의 평안함과 도덕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이다. 

때문에 "성인은 쉰다" 하였고 평안하게 다스려지면 욕심이 끊어져 깨끗해진다고 한 것이다. 

평안하게 다스려지고 욕심이 없어져 깨끗해지면, 

우환이 끼어들 수 없고, 요사스러운 기운이 침범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덕은 온전해지고 정신에도 결함이 없는 것이다.

 

성인은 살아서는 천지자연에 맡겨 행동하고,

죽어서는 만물의 변화를 따르는데, 

조용하게 있을 때는 음(陰)과 덕을 한 가지로 하고, 

움직일 때는 양(陽)과 흐름을 한 가지로 한다.

 

복을 부를 원인이 되는 일을 하지 않고, 

화를 부를 실마리가 되는 일도 하지 않으며 

느끼고 나서야 응하며, 급박하게 닥쳐야 움직인다.

부득이한 때라야 비로소 일어나고, 

지혜와 인위를 버려, 하늘의 이치를 따른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하늘의 재앙이 없고, 만물에 얽매임이 없으며, 

남의 비난을 받지 않고, 귀신의 나무람도 받지 않는다. 

그 살아서는 물 위에 떠있는 것 같고, 그 죽어서는 쉬고 있는 것 같다

 

생각하거나 근심하지 않고, 미리 꾀하지 않으며,

빛이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믿더라도 기대하지 않는다. 

잠을 자도 꿈꾸는 일이 없고, 깨어 나서도 아무런 근심이 없다. 

그 정신은 순수하고, 그 혼백은 피로하지 않다. 

허무 염담하여, 하늘의 덕과 합치되는 것이다.

 

夫恬惔寂漠虛无无爲 此天地之本而道德之質也  故聖人休焉 休則平易矣 平易則恬惔矣 平易恬惔 則憂患不能入 邪氣不能襲 故其德全而神不虧  聖人之生也天行 其死也物化 靜而與陰同德 動而與陽同波 不爲福先 不爲禍始 感而後應 迫而後動 不得已而後起 去知與故 循天之理  故曰无天災 无物累 无人非 无鬼責 其生若浮 其死若休 不思慮 不豫謀 光矣而不燿 信矣而不期 其寢不夢 其覺无憂 其神純粹 其鬼不罷 虛无恬惔 乃合天德

 

 

하서 김인후는 환벽당을 두고 환벽당을 두고 남은 감흥이다.

 

"꽃은 봄뜻을 머금었으나 분별함이 없건만 

사물을 느끼는 사람의 정은 얕고 깊음이 있구나. 

花含春意無分別 物感人情有淺深"

 

 

 

 

 

환벽당에서(環碧堂) 김창흡(金昌翕, 1653~1722)

 

 

환벽당에  있는 손님/

어찌 주인 아님을  알랴

돌아와 의지함은 명승이기 때문이요/

휘파람 불고 읊으니  또한  천진하다네

環碧堂中客 安知知非人 歸依因地勝 嘯詠亦天眞

 

송죽은 맑은 못에 모아 있고/

구름은 서석산을 둘러 있네

비가 와서 깨끗함  더하니/

내 벌써 검은 두건  쓰고  거니네

松竹澄潭會 雲嵐瑞石親 雨來添洒落 吾已岸烏巾(삼연집((三淵集)1권14)

 

영암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아비지 김수항을 문안하고 오르는 길에 능주 목사 오재(寤齋) 조정만(趙正萬 1656 효종 7∼1739 영조 15)과 함께 환벽당(環碧堂)에서 쓴 글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요 평론가였던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 1677 숙종 3∼1724 영조1)

스승이요 장인, 이조판서를 지낸  송상기(宋相琦 1657) 강진 유배지에 다녀오면서 남긴 남행집(南行集)에서 

 

勝地如高士。同德必有隣。瀟灑與環碧。騈列一溪濱

造物力廣大。賦形各殊倫。瀟灑品格妙。環碧擅風神

蒼石上盤陀。淸潭下漣淪。揮手弄文漪。游魚正可親

回視千竿竹。正立如偉人。嘯咏恣吾意。何必問主賓

伊昔河西翁。高情出風塵。杖屨常來往。愛此景物新

我來千載後。俛仰跡已陳。生旣不同時。欲見亦何因

仰視瑞石山。如得見公眞。作詩題岩間。欲以俟千春

 

환벽당

물소리와 산 경치 충분히 청진하고 水聲山色足淸眞

또 계단 있어 푸른대 심었다. 復有層臺種翠筠

뜻 실현되면 당연히 나라 다스릴 선비이건만 得志當爲經濟士

시기 잃고 돌아와 농사짓는 백성 되었네. 失時還作耕稼民

운림으로 찾아온 현제들과 시 주고받으며 雲林唱和來賢弟

암혈에서 고고하게 고인 사모하였네. 巖穴孤高慕古人

돌아보니 나는 속세에 사고 많아 顧我塵埃多事故

그대처럼 한가한 취미 속에 가난 참지 못함 부끄럽네. 愧君閑趣不專貧

 

 

 

소쇄원(瀟灑園) (1530년) : 고경명, 기대승, 김대기, 金璇, 김성원, 김언거, 김인후, 백광훈, 백진남(白振南), 송순, 신필(申滭), 양산보(梁山甫), 양응정, 양자순(梁子淳), 양자징(梁子澂), 오겸(吳謙), 유사(柳泗), 윤인서(尹仁恕), 임억령(林億齡), 정철(鄭澈) 이하곤

면앙정(俛仰亭) (1533년) : 고경명, 양 경우(梁慶遇), 기대승, 윤두수(尹斗壽), 양산보, 소세양(蘇世讓), 송순, 박순(朴淳), 이안눌, 임억령, 김인후, 임제(林悌), 노진(盧禛), 이황

환벽당(環碧堂) (1555년) : 김성원(金成遠), 김윤제(金允悌), 백광훈, 고경명, 기대승, 김인후, 송순, 양응정, 임억령, 정철 이하곤

식영정(息影亭) (1560년) : 고경명, 박광옥, 기대승, 김성원, 송순, 임억령, 신응시(辛應時), 양자정, 정철 이하곤

송강정(松江亭) (1770년) : 죽록정(竹綠亭)을 수정(1586)

문화.오인교/ nox9109@naver.com

 

http://www.hankukmail.com/newshome/detail.php?number=14826&thread=21r03r06r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