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영의정들보다 구석의 허난설헌을 찾는 까닭은

2021. 10. 9. 23:52여행/국내여행

숱한 영의정들보다 구석의 허난설헌을 찾는 까닭은

붉은 연꽃이 차가운 달빛 속에 지는구나
( 본문 )*
부용삼구타(芙蓉三九朶) 
붉은 연꽃 스물일곱 송이가
홍타월상한(紅墮月霜寒) 
찬 서리 달빛 속에 지는구나 .

조선중기 천재 여류시인 난설헌 ( 蘭雪軒 ) 허씨 ( 許氏 1563~1589) 의 ‘ 몽유광상산 ( 夢遊廣桑山 꿈에서 광상산과 노닐다 )’ 의 일부이다 . 광상산은 동해에 있으며 공자가 도를 깨치고 참임금이 되어 다스렸다고 도교에서 말하는 곳이다 . 이처럼 그녀는 늘 신선세계를 동경했다 . 8 세 때 지었다는 ‘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 ’ 은 광한전 ( 廣寒殿 달 속의 여인 항아가 산다는 궁전 ) 에 새로 지은 백옥루 ( 白玉樓 ) 의 상량식에 초대받은 것을 상상하면서 지은 글이다 . 자 ( 字 ) 인 경번 ( 景樊 ) 역시 중국의 여신선인 번부인 ( 樊夫人 ) 을 사모하여 스스로 부른 이름이다 . 항상 난초같은 청순함과 하얀 눈의 깨끗함이 함께하는 집이라는 난설헌도 그 연장선상이라 하겠다 . 뒤집어 말하면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적인 환경이 그만큼 녹록치 않았다는 말이 된다 . 당나라 시인 두목 ( 杜牧 803~852) 을 흠모했다 . 하지만 조선에서 태어난 것 여자로 태어난 것 한 집안의 며느리가 된 것 이 모든 것이 버겁기만 했다 . 결국 27 세에 요절했다 . 이 시가 임종게가 된 셈이다 . 본문 속의 숫자인 3·9 는 요즘 식으로 바꾸면 3×9=27 이다 .

( 해설 )
묘소는 서울에서 가까운 곳이다 . 중부고속도로에 진입한지 10 여분만에 빠져나온 경안 나들목 인근에서 멀지 않다 . 초월 지월 설월 등 월자를 돌림자로 사용하는 마을이름을 보니 예로부터 달빛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고장인 모양이다 . 달이 하늘에 있을 때는 신선들의 소유이겠지만 호수에 비칠 때는 비로소 인간세계의 소유가 된다 . 아니나 다를까 경수 ( 鏡水 ) 마을이란 표지판이 보인다 . 거울 같이 맑은 물에 비친 달빛을 상상하며 신선세계를 동경하던 그녀가 인간세계에서나마 안식을 찾기에 적당한 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여느 묘소와는 달리 발품은 팔지 않아도 됐다 . 묘역 앞이 바로 주차장인 까닭이다 .

상중하 3 단으로 이루어진 안동김씨 묘역 가운데 하단이 난설헌의 묘 ( 경기도 기념물 제 90 호 ) 다 . 원래 무덤은 현재 묘역에서 오른 편 500 미터 지점에 있었으나 고속도로 건설로 인하여 1985 년 11 월에 현재 위치로 이장했다는 안내판의 친절함을 뒤로 하고 새로 만든 반질반질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이내 묘역이 펼쳐진다 . 신랑은 둘째 부인과 합장되어 있고 당신은 혼자 묻혀 있지만 ‘ 주뚜 ( 주관이 뚜렷한 ) 답게 ’ 무덤도 비석도 당당하다 . 금슬이 좋지 못했던 신랑을 대신하여 살갑기만 한 두 자녀의 작은 무덤이 함께 하니 외롭지는 않겠다 . 이장 ( 移葬 ) 할 무렵 함께 세웠다는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만든 시비 역시 뒷면에는 ‘ 곡자 ( 哭子 아들 달을 여의고서 )’ 를 새겼다 . 앞면에 새겨진 ‘ 몽유광상산 ( 夢遊廣桑山 꿈 속에서 광상산에 노닐다 )’ 과 더불어 이 묘역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작품이 되었다 .

작년에는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거년상애녀(去年喪愛女)

금년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 .
금년상애자(今年喪愛子)

슬프구나 ! 광주 땅 언덕 위에 
애애광릉상(哀哀廣陵上)

한쌍 무덤을 서로 마주하여 만들었구나.
쌍분상대기(雙墳相對起)

쌍분 앞에는 큰외삼촌 허봉 ( 許篈 1551~1588) 이 남긴 제문을 새긴 작은 비석이 오늘까지 누이동생과 외조카들을 달래주고 있다 . 시집에서 인기있는 며느리와 부인은 아니었지만 친정집에는 여전히 우애있는 형제들이 있었다 . 허봉은 난설헌 처녀시절 당시 ( 唐詩 ) 의 대가인 이달 ( 李達 1539~1612 호 : 蓀谷 ) 에게 전문적인 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 막내동생 허균 ( 許筠 1569~1618) 은 “ 자기 시를 모두 태우라 ” 는 누나의 유언에도 아랑곳없이 남아있는 작품을 추스르고 또 자기가 외우고 있던 누나의 시를 합해 300 여수를 모았다 . 정유재란 이후 명나라 사신으로 와서 조선시 ( 朝鮮詩 ) 를 수집하고 있던 오명제 ( 吳明濟 ) 에게 전달했다 . 1600 년 무렵 명나라에서 난설헌 시 58 수가 포함된 『 조선시선 』 이 간행되었다 . 또 이후 방문한 문인 주지번 ( 朱之蕃 ) 에게 ‘ 난설헌집 ’ 을 중국문단에 소개토록 했다 . 모두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는 막내동생이 저지른 일이다 . 1711 년 분다야지로 ( 文台屋次朗 ) 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되었다 . 이후 조선땅으로 역수입되면서 그녀의 시는 재평가를 받게 된다 . 그 때나 지금이나 남의 나라 눈을 후하게 쳐주는 문화는 별로 달라진게 없다 . 하긴 ‘ 역주행 ’ 이라고 기분나빠할 일은 아니다 . 묻혀버리는 것보다 백배 낫기 때문이다.

1846 년 홍경모 ( 洪敬謨 1774~1851) 가 편집한 『 하남지 ( 河南志 ) 』 권 3 분묘 ( 墳墓 ) 편 맨 끝에 “ 허씨의 묘는 초월면에 있다 . 호는 난설헌이다 .” 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 문제는 현재 묘역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시가 ( 媤家 ) 어른들의 무덤 존재 기록이 없다는 사실이다 . 이 지역에 많고 많은 무덤 가운데 추리다보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 영의정을 지내고 도승지를 지내고 이조참판으로 추증된 권문세족들이 강가의 모래 숫자만큼 많을 것이다 . 집안식구들을 제외하고 그것을 누가 일일이 기억하랴 . 따라서 그런 직위나 자리가 아니라 남겨놓은 업적으로 평가하다보니 며느리가 맨끝 한 줄로써 집안의 체면을 살린 셈이다 . 허씨 집안의 ‘ 출가외인 ’ 이지만 김해김씨 문중의 식구인 까닭이다 . 문손들에게는 집안묘역에 난설헌 묘가 얹혀 있는 형국이겠지만 찾아오는 사람들의 눈에는 난설헌 묘에 집안어른들이 얹혀있는 모습으로 보일수도 있겠다 . 왜냐하면 난설헌 묘를 찾은 김에 주변어른과 재실의 역사를 함께 살펴보기 때문이다 . 이것이 시인이 가진 힘이다 .

글 원철 스님 / 불교사회연구소장

*
전문은 다음과 같다. 

碧海浸瑤海(벽해침요해) 
푸른 바다는 선계에 이어졌고
靑鸞倚彩鸞(청난의채난) 
빛깔고운 난새들 서로 기대는데
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 
붉은 연꽃 스물일곱 송이가
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찬 서리 달빛 속에 지는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