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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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육체(肉體) / 문병란
가을과 육체(肉體) - 문병란 모든 것들이 떨어지는 가을날 낙엽이 지는 것을 바라보면 질 것이 없는 내 마음 슬프다. 아름답지 않은 비듬,머리카락 낙엽처럼 곱게 물들지 않은 까칠한 파부 홀쭉한 두 뺨을 바라보며 떨어질 것이 없는 내 마음 슬프다 땀, 오줌, 온갖 배설물 향기롭지 않은 육신을 가지고 가을날 질 것이 없는 어께죽지 무거워지면 수그린 이마에서 죽음의 소리가 들린다 내 사랑도 그리움도 낙엽처럼 곱게 질 수 없을까 썩은 꽃자리에 열매처럼 향기롭게 익을 수 없을까 여름이 빠져 나가버린 나의 육체 질 것이 없는 앙상한 내 이마 위엔 주름살만 사납게 금 그어진다 애증이 머물다 긴 잿빛 가슴에 질 것이 없는 나의 가을 수척한 어깨 위에 고운 낙일이 정답게 두 손을 얹은다
2021.10.05 -
꽃씨 / 문병란 시인
꽃씨 / 문병란 시인 가을날 빈 손에 받아 든 작은 꽃씨 한 알 그 숱한 잎이며 꽃이며 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 오직 한 알의 작은 꽃씨 속에 모여든 가을 빛나는 여름의 오후 핏빛 꽃들의 몸부림이며 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 하나의 무게로 만져지는 것일까 비애의 껍질을 모아 불태워 버리면 갑자기 뜰이 넓어 가는 가을날 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 고이 여물어 가는 빛나는 외로움 오늘은 한 알의 꽃씨를 골라 기인 기다림의 창변에 화려한 어젯날의 대화를 묻는다
2021.09.21 -
새벽이 오기까지는 아직 우리들은 어둠에 익숙해야 한다 / 문병란
. 새벽이 오기까지는 / 문병란 새벽이 오기까지는 아직 우리들은 어둠에 익숙해야 한다 어둠에 스며들어 어둠의 일부가 되고 어둠과 속삭이며 오히려 어둠을 사랑하며 속속들이 어둠의 은밀한 가슴을 열렬히 두 팔로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한다 새벽이 오기 까지는 아직 머언 한밤중, 아직 우리들은 깊은 잠에 빠져서는 안 된다 피투성이 내일을 끌어안기 위하여선 한 톨의 불씨가 되어 묻혀있어야 하고 이 기나긴 공방 비록 신랑이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잿빛 창가에 기대어 서서 먼별의 약속을 믿으며 한 알의 꽃씨를 깊이 간직할 줄 알아야 한다 역사는 언제나 밤에 이루어지는 것 절망은 또 하나의 희망, 그것을 끌어안고 그것을 입 맞추며, 우리는 속속들이 어둠에 녹아들 줄 알아야 한다 피 젖은 어둠의 육신을 사랑 할 줄 알아야 ..
2021.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