貧而樂 富而好禮/빈이락 부이호례 가난해도 당당, 부유해도 예의바른 경지

2021. 12. 16. 20:04고전 읽기

 

O  증광현문(增廣賢文) 376.
부귀함에는 반드시 본래의 분수에 따르면 되고,
빈궁하다고 해서 생각을 굽힐 필요는 없다.

富貴定要依本分 貧窮不必枉思量
부귀정요의본분 빈궁불필왕사량


O 논어(論語) 술이(述而) 
子曰 : 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자왈 : 부이가구야, 수집편지사, 오역위지. 여불가구, 종오소호

“공자께서 이르기를, 부를 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내 비록 채찍을 잡는 천한 일이라도 하겠지만,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닐지니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바를 좇으리라

 


O 貧而樂 富而好禮/빈이락 부이호례

가난해도 당당, 부유해도 예의바른 경지   (김성회/CEO리더십 연구소장·숙명여대 경영대학원 초빙교수)

세상에 속이지 못할 3가지는? 가난, 기침, 사랑이라고 한다. 가난하면 '하고 싶은 일을 못할 뿐'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해야 하는' 부자유가 따라온다. 한자 자원으로도 유추할 수 있다. 축하의 하(賀)는 입인사론 부족하고, 재화(貝)를 보태줘야(加)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귀할 귀(貴)가 양손(臾)에 재물을 쥔 상태라면, 천할 천(賤)은 재물이 얼마 남지 않은(잔·나머지 잔) 상태다. MZ세대는 파이어족(조기 은퇴)을 일찍이 꿈꾼다고 한다. 근로소득보다 사업소득, 그보다는 금융자산소득으로 사는 게 '찐부자'라는 이유에서다.

공자는 '논어'에서 제자 자공(子貢)과 이런 문답을 나눈다. 자공은 스승 생전엔 스폰서, 사후엔 마케터 역할을 자임한 재벌급 제자다. 제자의 인정 욕구 가득한 질문에 스승은 한 단계 더 높은 요구를 한다. "가난하면서 아첨하지 않고, 부자이면서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貧而無諂 富而無驕/빈이무첨 부이무교)"라고 묻자 "괜찮다. 하지만 가난을 즐길 수 있고, 부자이면서 예를 아는 것만은 못하다(貧而樂 富而好禮/빈이락 부이호례)"고 답한다.

3단계로 정리하자면 하수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아첨하고, 부자란 이유로 교만한 단계다. 중수는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고, 부자지만 교만하지 않은 상태다. '누더기 솜옷을 입고, 호피코트를 입은 사람 옆에 서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제자 자로가 이에 해당한다. 고수는 부자이면서 예절을 알고,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행할 줄 알고, 가난하더라도 나름 즐길 줄 안다. 마음이 여유롭고 오라가 뿜어 나오는 심광체반(心廣體胖) 경지다.

'장자'에선 자공과 가난뱅이 동학 원헌의 대화를 통해 대조된다. 어느 날 자공이 최고급 마차, 수행원 부대를 거느리고 원헌의 집을 방문하는데 골목 어귀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마차가 통행할 수 없는 빈민가 골목에 깨진 항아리 조각을 이어 붙인 창문의 쓰러져 가는 집, 초라한 행색의 원헌을 보자 자공은 부지불식간에 "무슨 병에 걸렸는가" 탄식을 내뱉는다. 원헌은 당당하게 반박한다.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貧)이라 하고, 도를 배우고도 실행하지 못하는 사람을 병(病)들었다고 한다. 나는 가난한 것이지, 병들지는 않았다."

앞에서 공자가 말한 '부유하면서 예절까지 아는' 경지는 오늘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가깝다.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부유하지 않더라도 당당한' 자세다. 돈은 없더라도 '가오'는 지키고자 하는, '찌들지도, 쫄지도, (눈물·콧물) 짜지도' 않는 정신적 자립은 파이어족의 경제적 독립만큼이나 필요하다. '빈곤'을 '비천'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돈보다 비겁과 비굴이다. 동감을 넘어 동정을 강요할 때 가난은 비천으로 추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