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12. 15:13ㆍ고전 읽기
子曰 君子는 周而不比하고 小人은 比而不周니라 - 논어 論語 위정(爲政)편:
공자는 말씀하셨다.
“군자는 두루 사랑하되 편 가르지 않으며, 소인은 편 가르되 두루 사랑하지 않는다.”
군자의 사랑과 소인의 사랑은 겉으로는 비슷하지만 사랑하는 목적이 다르다.
周와 比는 모두 사랑한다는 뜻이지만 周는 차별 없이 두루 사랑하는 것이고
比는 이익을 위해 편을 지어 사귀는 것으로 사람이 목적이 아니라 유익함을 목적으로 하는 사랑이다.
탕평蕩平
『서경(書經)』「홍범편(洪範篇)」의 “무편무당(無偏無黨) 왕도탕탕(王道蕩蕩) 무당무편(無黨無偏) 왕도평평(王道平平)”의 구절 ‘탕탕평평(蕩蕩平平)’을 줄인 말이다. 군주의 정치가 지극히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했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중국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정벌하고 기자(箕子)에게 도(道)를 묻자, 기자가 이상적인 정치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규범을 9개의 범주, 곧 구주(九疇)로 나누어 설명한 내용이다.
탕평이란 용어는 홍범구주 가운데 다섯 번째인 황극(皇極)에 나오고, 천하 사람들과 거북점 · 시초점의 의견이 합치되는 ‘대동(大同)’이란 용어는 일곱 번째인 계의(稽疑)에 나온다.
그러므로 「홍범편」 체제 속에서 탕평은 대동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이상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유가(儒家)에서도 고대 중국의 정치사상을 압축한 「홍범편」을 받아들여 유가 정치론의 하나의 전형이 되었다.
정조 탕평비蕩平碑 1742년(영조 18)
영조는 왕세제시절에 당쟁의 폐해를 직접 경험하였기 때문에 즉위하자마자 당쟁의 조정에 힘을 기울였다.
1725년(영조 1) 1월 당쟁의 폐를 통언(痛言)하면서 붕당을 조성하는 자는 종신토록 금고(禁錮)하여 국정에 참여시키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영조 자신이 친서하여 이를 비에 새겨 성균관의 반수교(泮水橋) 위에 세운 것이 정조 탕평비蕩平碑이다.
영조는 『논어』 위정편 14장 “군자는 두루 원만하고 편향되지 않으며, 소인은 편향되고 두루 원만하지 못하다(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를 활용하여
“두루 원만하고 편향되지 않음이 군자의 마음이고, 편향되고 원만하지 못함이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라고 재구성하여 친서하고 비에 새겨 성균관에 세웠다.
현재 이 비는 성균관대학교 내에 보관되어 있다.
1727년에는 노론의 장기집권에서 오는 폐단을 제거하고자 노론의 강경파를 출척(黜斥)하고 소론을 등용하였으며,
또 양파의 조정에 유의하여 노론의 영수와 소론의 영수를 친히 불러 융화를 주선하였다.
이어 왕은 각 파의 온건론자를 등용하여 탕평책을 펼쳐나갔다.
탕평책의 하나로 청요직의 자리에 각 파의 인물을 균형있게 등용하여 서로 견제하게 하였다.
이렇게 정책을 펼쳐나가자 어느 정도 탕평정국을 이루었다. 이후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소북 등의 인물도 등용하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당파에 상관없이 인재 등용도 가능하게 되었다.
1742년에는 관학의 최고학부인 성균관의 반수교 위에 탕평비를 세워 유생들에게 서로 편을 나누지 않고 당을 나누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을 알리게 하였다.
역사용어사전 | 서울대학교 역사연구소 탕평蕩平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77XX61301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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